'타자'라는 말이 빈번하게 쓰이고 있는 지금, 이 단어가 레비나스로부터 시작되었음
서동욱 교수가 레비나스의 서적에 대한 칼럼을 쓴것중 일부이다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진정한 삶’이 부재하는 세계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우리와 다른 대상을 먹거나, 우리에게 필요한 물건으로 바꾸거나, 또는 우리의 인식의 대상으로서 소유한다. 욕구(besoin)하는 대상을 흡수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나에게 종속된 것으로 만든다. 한 마디로 나는 마이다스 왕처럼 온갖 타자를 자기 소유의 황금으로 바꾸면서 내가 주인인 세계를 구성한다. 자기보존욕을 타고난 존재자 일반은 자기 욕구를 충족시키게끔 되어있다. 요컨대 “존재자가 자기 자신에게 전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레비나스는 내가 세계의 주인으로써, 나의 욕구에 따라 세계를 즐기고 관리하는 이러한 존재 양식, 혹은 나 자신에게 몰두하여 끊임없이 나의 세계로 귀환하는 사유를 일컬어 ‘존재론’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나의 존재에 전념하는 “이 시간은 슬픔을 달래고 죽음을 극복하기엔 충분치 않다.” 그것은 노동을 하고 먹거리를 벌어 나를 먹이는 일이 반복될 뿐 아무런 질적 도약이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노동과 향유를 통해 세계 안의 모든 것을 자기의 소유물로 만든 이 고독한 부자에게 찾아올 새로운 손님이란 죽음 밖에 없는 것이다. 죽음이 도착할 때까지 노동과 향유라는 천편일률적인 순간들이 반복되리라."
"이렇게 신은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타자와의 관계라는 맥락 속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 된다. 그러니 교회가 아니라, 이기적인 바람을 담은 기도 속에서가 아니라, 먼저 고통 받는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신은 도래한다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타자와의 관계가 ‘신’이라는 말이 비로소 의미를 지니게 되는 맥락이라면, ‘존재자’로서의 신을 믿지 않고도 우리는 신이란 말을 유의미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레비나스의 초월 또는 형이상학이란 바로, 타자의 얼굴을 자신의 흔적 삼아 나타나는 무한자와 관계함을 말한다. 이 관계란, 내가 나에게 전념하는 세계를 떠나, 나와 전혀 다른 자에게로 가서 그를 위해 나를 종처럼 건네주는 일이다. "
꽤나 현대적이지 못한 이러한 생각들이 지금 동시대에 유효할지 모르겠지만,
나 자신에게 집중하는 삶이 아닌, 좀더 타인을 향해 있는 삶이 더 나은 삶이라는
너무나 이기적인 나로서는 아직 너무나도 먼길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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